스테이블코인 — '항상 1달러'라는 약속이 깨질 때
'스테이블코인은 언제나 1달러니까 원금이 보장된다.' 널리 퍼진 이 문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1달러를 목표로 설계됐다'와 '언제나 1달러다'는 완전히 다른 말이거든요. 그 차이가 실제로 무엇을 갈랐는지, 두 사건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최근 업데이트: 2026-07-22
페그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닐까요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은 이름 그대로 가치를 '안정적으로(stable)' 유지하도록 설계된 암호자산입니다. 대부분 미국 달러 같은 법정화폐에 1:1로 값을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렇게 특정 값(예: 1달러)에 가치를 고정해두는 것을 '페그(peg)'라고 합니다. 비트코인처럼 마구 출렁이지 않으니, 코인 거래의 '기준 화폐'나 잠시 돈을 대기시켜 두는 용도로 널리 쓰입니다.
여기서 오해가 생깁니다. 페그는 법으로 정한 고정환율일까요? 아닙니다. 발행사가 '이 값을 지키겠다'고 선언하고, 그 선언을 뒷받침할 장치를 스스로 마련해 두는 사적인 약속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질문은 '이 코인이 1달러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이 1달러를 떠받치고 있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페그는 그냥 유지되는 게 아니라, 뒤에서 그것을 떠받치는 장치가 있어야 유지됩니다.
페그를 떠받치는 세 가지 방식
스테이블코인이 1달러를 유지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법정화폐 담보형. 발행사가 코인 발행량만큼 실제 달러·국채 등을 준비금으로 쌓아둡니다. USDT(테더), USDC가 대표적입니다. 가장 흔하지만, 준비금이 진짜 충분한지·어디에 보관됐는지가 관건입니다.
둘째, 암호자산 담보형. 다른 코인을 담보로 맡기되, 코인 값이 출렁이니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초과담보) 맡깁니다.
셋째, 알고리즘형. 실물 담보 없이 프로그램과 차익거래 유인만으로 페그를 유지하려는 방식입니다.
그럼 세 방식은 무엇이 다를까요? 위험이 놓인 자리가 다릅니다. 담보형의 위험은 '담보를 맡겨 둔 바깥세상'에 있습니다. 은행이 흔들리면 코인도 흔들립니다. 알고리즘형의 위험은 '설계 자체'에 있습니다. 담보가 없으니 기댈 곳은 참여자들의 믿음뿐이고, 그 믿음이 사라지면 떠받칠 것이 남지 않습니다.
이론은 그럴듯했지만 실전에서 무너진 대표 사례가 알고리즘형입니다.
담보 없이 1달러를 지키겠다던 설계 — UST
테라의 UST는 달러 담보 없이, 자매 코인인 루나(LUNA)와의 교환으로만 1달러를 유지하려 한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이었습니다.
구조는 이렇습니다. UST 1개는 언제나 1달러어치의 루나와 바꿀 수 있게 설계됐습니다. UST가 1달러보다 싸지면 사람들이 싸게 사서 1달러어치 루나로 바꿔 이득을 보고, 그 과정에서 UST가 줄어 값이 다시 1달러로 올라온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이 설계는 언제 작동할까요? 루나에 값이 붙어 있을 때만 작동합니다. 교환의 반대편에 있는 루나가 가치를 잃으면, '1달러어치 루나'라는 약속 자체가 빈 약속이 됩니다.
UST는 한때 시가총액 기준 3위 스테이블코인이었고, 루나는 시총 400억 달러가 넘었습니다. 규모가 크다는 사실이 이 구조적 취약점을 가려 주지는 못했습니다.
죽음의 소용돌이 — 2022년 5월
'디페그(depeg)'는 스테이블코인이 목표 가치(1달러)를 지키지 못하고 이탈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파괴력을 보여준 사건이 2022년 5월 테라USD(UST) 붕괴입니다.
2022년 5월 초, 대규모 인출이 시작되자 페그가 흔들렸습니다. UST는 며칠 만에 1달러에서 0.60달러, 0.30달러로 무너지며 95% 넘게 폭락했고, 페그를 회복시키려는 구조상 새 루나가 대량으로 발행됐는데 이는 오히려 루나 가격을 폭락시켰습니다.
루나가 싸질수록 UST를 지탱할 힘이 약해지고, 그러면 UST가 더 무너지고, 다시 루나가 더 발행되는 악순환이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죽음의 소용돌이(death spiral)'입니다. 루나는 5월 5일 약 87달러에서 5월 13일 0.00005달러 수준으로, UST도 1달러에서 0.2달러 아래로 붕괴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속도입니다. 왜 이렇게 빨랐을까요? 페그를 지키려고 만든 장치가, 위기 상황에서는 붕괴를 가속하는 장치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발행을 늘려 값을 떠받치려던 시도가 공급 폭증으로 값을 더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설계가 나쁜 상황에서 반대로 작동한 것이 아니라, 설계된 대로 작동한 결과가 붕괴였습니다.
며칠 만에 루나·UST 시가총액 약 400억 달러 이상이 증발했고, 연관 손실을 포함하면 최대 600억 달러 규모로 추정됩니다. 증발 규모는 집계 기준에 따라 다릅니다(UST+루나 약 400억~450억 달러). 국제결제은행(BIS)은 2022년 5~6월 암호·디파이 영역에서 소실된 가치를 그보다 훨씬 큰 규모로 집계했습니다.
담보형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 USDC와 SVB(2023)
'그럼 진짜 달러로 담보한 코인은 안전하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담보형도 100%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2023년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습니다. 그런데 USDC를 발행하는 서클(Circle)이 준비금 중 약 33억 달러를 하필 이 은행에 넣어두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USDC는 일시적으로 페그가 깨져 0.88달러까지 떨어졌습니다(거래소에 따라 0.86달러 부근까지 내려갔다는 집계도 있습니다).
다행히 미국 당국이 SVB 예금 전액 보장을 발표하고 서클도 자금이 안전하다고 확인하면서, USDC는 약 사흘 만에 1달러로 회복했습니다.
이 사건이 드러낸 담보형의 약점은 무엇일까요? 준비금은 코인 안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어딘가의 은행 계좌와 국채 계좌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담보형 스테이블코인은 '코인의 위험'뿐 아니라 '준비금을 맡긴 곳의 위험'을 함께 안습니다. 완전 붕괴는 아니었지만, 그 연결 고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된 셈입니다.
스테이블코인은 은행 예금이 아니며 예금자보호 대상이 아닙니다. '1달러 보장'은 발행사의 약속과 준비금에 달린 것이지, 국가가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 20%'는 수익률이 아니라 신호였습니다
테라 사태를 키운 것은 코인 구조만이 아니었습니다. '연 20% 수익' 같은 높은 이자를 내걸던 예치 서비스가 자금을 빨아들였습니다.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몇 %인가'일까요? 아닙니다. '이 이자가 어디서 나오는가'입니다. 은행 예금 이자는 은행이 그 돈을 빌려주고 받은 이자에서 나옵니다. 채권 이자는 발행자가 사업이나 세금으로 갚습니다. 출처가 분명합니다.
반면 테라의 고이자는 지속 가능한 수익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고, 새 자금 유입이 멈추자 구조 전체가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높은 수익률은 그 자체로 위험 신호일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구조로 높은 수익을 약속하는 상품은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왜 이렇게 높은 수익을 줄 수 있는가'에 명확한 답이 없다면,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답이 나에게 불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금과 무엇이 결정적으로 다를까요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은 예금의 대체재일까요? 정리해 봅시다. 스테이블코인과 은행 예금은 '넣어두면 값이 그대로'라는 인상이 비슷하지만, 그 인상을 뒷받침하는 것이 전혀 다릅니다.
예금은 국가가 운영하는 예금보험 제도가 일정 한도까지 받쳐 줍니다. 은행이 망해도 그 한도 안에서는 돌려받습니다. 스테이블코인에는 그런 장치가 없습니다. 받쳐 주는 것은 발행사의 준비금과 신뢰, 그리고 시장의 차익거래뿐입니다.
두 사건을 나란히 놓으면 결론이 선명해집니다. 알고리즘형 UST는 완전히 붕괴해 거의 0이 됐고, 담보형 USDC도 준비금을 맡긴 은행이 흔들리자 함께 흔들렸습니다. 회복 여부는 갈렸지만, '값이 고정돼 있다'는 전제가 깨질 수 있다는 사실은 둘 다 똑같이 보여 줬습니다.
'스테이블(안정)'이라는 이름이 안정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스테이블코인도 무위험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페그가 깨지는 순간이 그 코인 하나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숫자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가격 데이터에서 UST가 무너진 2022년 5월부터 7월까지를 잘라 계산하면, 그 구간에서 비트코인은 2022년 5월 4일 고점에서 6월 18일 저점까지 -52.09% 내렸고 이더리움은 같은 날짜 구간에서 -66.21% 내렸습니다.
1달러를 지킨다던 설계가 무너지자, 그 코인을 담보나 유동성으로 쓰던 시장 전체가 함께 흔들린 것입니다. 예금은 보호 한도 안에서는 다른 곳의 사고가 내 원금을 깎지 않습니다. 그 차이가 두 상품을 나누는 지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스테이블코인은 '항상 1달러'니까 손실 위험이 없나요?
아닙니다. '1달러를 목표로 한다'와 '항상 1달러다'는 다릅니다. 알고리즘형 UST는 완전히 붕괴해 거의 0이 됐고, 담보형 USDC도 은행 위험으로 일시적으로 0.88달러까지 떨어졌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은 예금자보호도 없어, 발행사·준비금·시장 상황에 따라 손실이 날 수 있습니다.
Q. 그럼 어떤 스테이블코인이 제일 안전한가요?
특정 코인을 '안전하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준비금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실물 담보가 충분한 쪽이 알고리즘형보다 위험이 작다고 평가되지만, USDC 사례처럼 담보형도 준비금을 맡긴 곳이 흔들리면 함께 흔들립니다. 어떤 스테이블코인도 무위험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Q. 연 20% 이자면 좋은 것 아닌가요?
지나치게 높은 이자는 그 수익이 어디서 나오는지 반드시 따져봐야 합니다. 테라의 고이자는 지속 가능하지 않았고, 자금 유입이 멈추자 구조 전체가 무너졌습니다. '왜 이렇게 높은 수익을 줄 수 있는가'에 명확한 답이 없다면 위험 신호입니다.
Q. 디페그가 일어나면 항상 회복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USDC는 당국의 예금 전액 보장 발표와 발행사의 확인이 겹치며 사흘 만에 회복했지만, UST는 회복하지 못하고 붕괴했습니다. 회복 여부는 '담보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떠받칠 주체가 있는가'에 달려 있으며, 알고리즘형처럼 담보가 없으면 되돌릴 수단 자체가 없습니다.
참고자료
- $3.3 Billion of USDC Reserve Risk Removed, Dollar De-peg Closes — Circle (USDC 발행사) 공식 발표
- Crypto shocks and retail losses (BIS Bulletin No 69) —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 Why Stablecoins Fail: An Economist's Post-Mortem on Terra (Economic Brief 22-24) — Federal Reserve Bank of Richmond